[디지털타임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코로나19 방역 위해 매일 마셔라"… 러시아의 `보드카 신념
글쓴이 :
HK담당자
등록일 :
2021-05-04 12:00:00
조회수 :
2,920회
글쓴이 : HK담당자
등록일 : 2021-05-04 12:00:00
조회수 : 2,920회
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③ 유라시아 역사문화 탐방 - 절제와 \'말\'의 향연(6)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팬데믹 초기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이 내놓은 방역 조언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매일 보드카를 마시고 하루에 두세 번씩 건식 사우나를 하라는 것이었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방책에 실소를 금치 못하겠지만, 이러한 조언 뒤에는 구소련 권에서 오랫동안 치료제로 사용되어온 보드카에 대한 신념이 밑바탕하고 있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보드카(vodka)는 14세기부터 만들어진 무색, 무미, 무취의 증류주로, 러시아어로 물을 뜻하는 \'보다(voda)\'에서 유래했다. 러시아인은 보드카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매일, 그것도 엄청난 양을 마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잘못된 편견이다. 러시아에서는 보드카를 마실 때 나름의 도(道)가 있다. 러시아에는 \'취하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건강을 위해 마신다\'라는 말이 있다. 기후와 환경으로 인해 독주(毒酒)를 선호할 뿐 러시아의 술 문화는 의외로 낭만과 유희적 요소로 가득한 특징이 있다.
보드카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술이지만, 의외로 그 기원은 폴란드에서 시작되었다. 14세기에 알코올 증류 기술이 신성 로마 제국에서 폴란드로 전해졌다. 16세기에 이르러 폴란드에서는 증류주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자극성이 강한 술\', 목이 화끈거린다는 의미의 \'고렐카\'라고 불렀다. 하지만 당시의 보드카가 곡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17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곡물, 그중에서도 호밀이 보드카의 주원료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1399년 보드카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끓인 술\' 및 호프와 꿀을 \'달인 술\' 등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제노바 상인이 러시아에 알코올을 가져오면서 14세기부터 보드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수도사 이시도르(Isidor)가 1430년 보드카라고 불리던 곡물발효주를 만들었다는 설이 서유럽에 널리 퍼져있지만, 이는 서유럽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1440년에서 1470년 사이 러시아의 한 수도원에는 양조장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곡물 발효 알코올로 보드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보드카라기보다는 맥주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보드카의 존재에 관한 가장 신뢰할 만한 근거는 1517년 러시아에서 추위를 피하고자 귀리로 (목구멍이) 타는 듯한 액체와 알코올을 만들었다는 것과 이들이 독일인, 폴란드인처럼 맥주와 보드카를 마셨다는 내용이다.
러시아의 보드카는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주로 호밀로 만들었지만, 이후 밀과 감자를 이용한 것이 등장했다. 감자로 만든 보드카는 곡물 보드카에 비해 맛이 한참 떨어졌지만, 기술의 발달로 맛도 좋아지고 호밀로 만든 곡주보다 가격도 훨씬 저렴해서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보드카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차갑게 냉각시켜 마셔야 한다. 살짝 냉동을 시키면 보드카는 젤리처럼 점성이 생기는데, 이럴 때 본연의 풍미가 잘 산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서 만든 초기의 보드카는 곡물 발효주였지 물과 알코올 혼합 형태가 아니었다. 증류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원소주기율표의 창시자로 유명한 멘델레예프 덕택이었다.
멘델레예프(1834-1907)는 흔히 \'보드카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보드카가 물과 알코올의 이상적인 비율로 만들어지는 데에는 그의 공이 컸다. 그의 박사학위논문 \'알코올과 물의 혼합에 관하여\'(1865)에서 인간의 입맛에 가장 적합하며 숙취가 적은 도수는 40도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반전이 있으니, 보드카의 도수가 표준화된 것은 이미 멘델레예프보다 한 세기 이전인 표트르 대제(1672-1725) 치세 때였다. 당시 사람들은 보드카의 품질과 물의 희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가열하고 불을 붙이는 실험을 가했다. 물과 알코올의 혼합물은 그 특성상 지나치게 고품질인 경우 절반 이상이 타버리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알코올 함량이 38도에서 39도 사이로 조절되었다.
멘델레예프는 알코올의 중량이 46%인 용액이 가장 큰 압축이라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더 큰 반전은 멘델레예프가 \'러시아의 지식\'(1907)라는 책에서 자신은 평생에 걸쳐 보드카를 마신 적이 없으며, 소금과 독이 많이 들어간 맛 외에 보드카의 맛을 전혀 모른다고 밝힌 것이다. 사실 멘델레예프는 보드카의 맛이나 향, 이점과 위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보드카 속의 알코올과 물의 이상적인 비율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멘델레예프가 보드카를 발명했다는 것은 정설처럼 퍼져있지만, 이는 사실상 과장된 신화에 불과하다. 멘델레예프의 발명설은 보드카 생산자로 유명한 표트르 스미르노프(1831-1898)에게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스미르노프는 멘델레예프의 명성을 이용해 그가 자신이 만드는 보드카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을 냈다. 멘델레예프는 젊은 시절 유명 보드카 제조업자인 바실리 코코레프와 협력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석유 생산 및 운송 분야의 고문 자격으로 참여했을 뿐, 보드카 생산 업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보드카의 도수가 40도로 정착한 결정적 계기는 러시아 재무부 장관 레이테른(M. Reytern, 1820-1890)이 보드카의 도수를 38.5도에서 40도로 반올림하자고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이는 보드카의 품질이나 부드러운 목넘김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세금 계산 때문이었다. 당시는 도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방식이었기에 소수점이하의 숫자로 계산이 복잡해지는 것을 막고 주세도 높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보드카가 러시아에서 인기를 누리게 된 데에는 추위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보드카는 알코올음료의 기능 외에도 민간치료제로 사용되었다. 특히 감기 치료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드카에 붉은 고추나 후추를 우려내서 마시거나 또는 꿀과 라즈베리를 섞은 후 해열제와 함께 뜨거운 물을 타서 마신다. 그러면 충분한 땀이 나고 감기가 쉽게 낫는다. 또한 고열이 있을 시 몸에 보드카를 바르는 비법이 소련 시절부터 전해져왔다. 알코올이 휘발되면서 체온이 떨어지는 효과를 얻기 때문이다. 입술 주위에 발진이 생겼을 때는 뜨겁게 데운 보드카를 화장 솜에 적셔 손상된 부위에 두드려 바른다. 치통으로 고생할 때는 입안을 헹구는 항균제로 사용하고, 귀에 통증이 생겼을 때는 보드카 찜질로 통증을 완화시킨다. 붉은 고추를 우려낸 보드카를 두피에 바르면 소독과 함께 적당한 자극이 되어 혈류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머리칼을 건강하고 윤기 있게 만든다.
또한 보드카는 잡냄새를 없애고 음식의 맛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러시아에는 특별한 향신료가 없는 대신 보드카가 음식의 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마치 우리의 생강과 맛술이 내는 효과처럼 보드카는 식욕을 돋우고 소화를 도우며 음식의 맛을 향상시킨다. 보드카는 강력한 강장제이기도 하다. 적절한 양의 보드카는 권태와 우울, 무기력함을 이겨낼 수 있는 약이다.
러시아에서는 보드카를 절대로 병 단위로 주문하지 않는다. 보통 다른 음료들은 리터 단위를 사용하지만 럼주와 보드카, 코냑 등의 독주는 그램 단위를 사용한다. 식당에서 100그램, 200그램, 300그램 단위로 주문을 하면, 플라스크 모양의 유리병에 보드카를 담아 내온다. 그램 단위로 먹는 습관은 소련 시절의 금주령과 보드카 배급제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보드카 잔은 \'륨카\'라고 일컬으며, 50그램의 크기로 우리의 소주잔과 거의 동일하다. 보드카의 첫 잔은 단숨에 들이킨다. 러시아어로 \'바닥까지(do dna)\'를 뜻하는 원샷 이후에 술잔을 뒤집어 머리 위로 들어 보이며 비웠다는 표시를 하기도 한다.
술자리를 파할 때에는 길 떠나기 전 마지막 술이란 의미의 \'나 포사쇼크(na pososhok)\'를 마신다. 포샤쇼크는 \'지팡이\'라는 뜻으로, \'나 포샤쇼크\'는 지팡이에 의지해 간다는 장난스런 말이다. 마지막 잔 역시 단숨에 들이키는 것이 예의다. 러시아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해장술 문화가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보드카를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자주 사용하는 속담이 있다. 첫 잔은 막대기(를 쑤셔놓는 것) 같지만, 두 번째 잔은 매(가 날아가는 것) 같고, 그 다음 잔부터는 작은 새(가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한다. 즉, 보드카의 화끈한 맛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마시면 마실수록 부드럽다고 설득시키는 말이다.
러시아인은 건배사 없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 보통 식탁에 앉은 남자들 가운데 모임을 주도할 한 사람을 정한다. 조지아(Georgia) 말로 \'타마다(tamada)\'라고 하는 \'장(長)\' 또는 \'리더\'를 의미하는 이 사람은 파티나 여러 사람이 모든 자리에서 직접 건배를 제안하거나 모임에 배석한 사람에게 건배를 제안해줄 것을 부탁하는 역할을 한다. 러시아의 전통에 따르면 모임에는 성찬과 더불어 풍성한 \'(건배의) 말\'이 있어야 한다. 식탁에서 쏟아내는 화려하고 멋진 말은 상대방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고 음식을 대접하는 여주인을 칭찬하는 등의 건배사는 러시아인의 넉넉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러시아에서는 술잔을 들고 받으면 복이 달아난다 해서 잔을 들지 않고 받는다. 우리와는 달리 잔에 술이 남아 있더라도 새 술로 신선하게 만든다는 취지에서 첨잔이 가능하다. 술을 따를 때는 차나 물을 따를 때와 마찬가지로 잔이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붓는다. 보드카에 어울리는 안주로는 절인 오이와 청어, 흑빵, 살로(salo, 소금에 절인 비계)가 인기 있다.
보드카는 정치적 통제수단으로도 자주 이용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1729-1796)는 \'취한 민중을 다스리기란 쉽다\'는 말을 즐겨 사용하며 중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러시아인이 보드카를 즐겨 마시게 된 데에는 의외로 종교적인 이유가 숨어 있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페르시아의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이븐 시나(Ibn Sina)가 정류(精溜)를 얻는 방법으로 증류를 언급한 것을 토대로 알코올의 역사를 무슬림 사회로부터 시작된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슬림 사회는 술을 거부해서 이후 알코올 음료가 발달하지 않았다. 정교를 수용한 러시아는 무슬림이 술을 거부하는 것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욱 술 문화에 열린 태도를 취했다는 설이 있다.
1985년 고르바초프는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금주법을 시행하였다. 주류 판매시간을 오후 2시에서 5시로 제한하고 21세 미만은 술을 구입할 수 없게 했다. 소련에서 직장 내의 음주는 공공연한 일이었고 취한 상태로 출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자 집에서 밀주를 만들어 먹는 일이 잦아졌고 알코올에 대한 집착으로 온갖 것으로 술을 만들어 먹는 풍조가 생겨났다. 소련 붕괴 이후 재정난이 심각했던 1990년대에는 보드카가 화폐를 대신해서 급여로 지불되었다. 그로 인해 술 소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러시아 남성의 평균 연령이 다른 나라에 비해 10년 이상 낮은 이유도 보드카 때문이었다. 보드카를 마시고 시비 끝에 폭력으로 급사하거나 길에서 동사(凍死)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보드카가 러시아의 부정적인 면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자존심과 결부되는 중요한 코드이기도 하다. 러시아 보드카의 대표적 브랜드 \'스미르노프\'를 두고 미국과 벌인 오랜 원조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벨루가\', \'루스키 스탄다르트\', \'스톨리츠나야\' 등 다양한 보드카 브랜드들이 알려져 있지만, 세계 최고의 보드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미르노프\'를 떠올린다. \'스미르노프\'는 처음에는 러시아의 것이었지만 여러 우여곡절 속에 미국이 독점권을 갖게 되었다.
멘델레예프를 보드카 원조에 끌어들였던 바로 그 인물, 표트르 스미르노프는 황실에 보드카를 공급하던 거상(巨商)으로 1860년에 출시된 자신의 이름을 딴 보드카로 유명세를 떨쳤다. 1893년 표트르가 죽은 후 아들인 니콜라이와 블라디미르가 그의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스미르노프\'는 러시아 보드카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로 성장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보드카 공장이 국유화되자 블라디미르는 1920년 터키의 이스탄불로 터전을 옮겼다. 1924년에는 폴란드령이었던 르보프(오늘날의 우크라이나)로 이동해 \'Smirnoff\'라는 신제품을 출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유럽전역으로 수출될 만큼 상승세를 탔다. 1925년에는 프랑스에도 양조장을 열 정도로 \'Smirnoff\'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1933년에 블라디미르는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 출신의 루돌프 쿠네트(Rudolf Kunett)에게 보드카 생산 권한을 양도했다. 1937년 쿠네트는 \'Smirnoff\'의 권리를 휴블레인(Heublein)의 사장 존 마틴에게 넘겼고, 휴블레인은 이후 \'Smirnoff\'를 세계 최고의 보드카로 성장시켰다. 러시아 문화를 상징하는 보드카의 세계적인 브랜드가 미국에서 생산되는, 러시아인들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자취를 감춘 \'스미르노프\' 보드카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표트르 스미르노프의 고증손자 보리스가 주축이 되어 러시아판 진짜 \'스미르노프\' 보드카를 생산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러시아산 \'스미르노프\'는 밀로 만드는 미국산 \'Smirnoff\'와는 맛의 차별화를 두고 정통 보드카를 표방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일반 보드카에 가까운 생산 방식으로 선회했다. 병모양도 예전의 모습과 흡사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수십 년간 \'Smirnoff\'를 생산해오던 미국 양조회사에서 상표 사용금지 처분 신청을 냈고, 브랜드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러시아 양조회사가 반소를 제기하면서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스미르노프\'는 키릴문자로, 미국에서 생산되는 것은 로마자로 표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보드카로 상징되는 러시아지만, 정작 이들의 음주문화는 속도와 양이 아닌 풍요로운 \'말\'의 가치로 승부한다. 오늘날에는 책임질 수 없는 말이 난무하고 \'말\'의 인플레이션 또한 심하지만, 러시아인은 잔치와 모임에서 덕담 가운데 나누는 진심 어린 \'말\'과 칭찬, 감사로 진정성을 표현해왔다. 보드카는 이들의 만남에서 서로를 통하게 하는 매개체로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왔다.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보드카로 인해 고주망태가 되어 온갖 기행을 저지르는 러시아인들의 음주문화는 사실 덕담을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러시아 술자리의 본질과 거리가 있는 것이다. 추위와 한때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폭음을 일삼았던 것도 사실인 러시아의 음주문화, 하지만 보드카와 진정 어린 말을 통해 따뜻한 인간관계의 형성을 추구했던 것 또한 러시아의 중요한 음주문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보드카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되새겨 보길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