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유명 정치·예술인의 고향… 러시아를 사로잡은 캅카스의 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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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담당자
등록일 :
2021-04-18 12: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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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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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반도를 향한 한 걸음… 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③ 유라시아 역사문화 탐방 - 캅카스와 러시아 식문화(4)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엘부르스 산이 있는 곳, 터키 동북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Kavkaz) 지역은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이자 점이지대로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 해발 2500m에서 5000m 되는 험한 산들이 가로지르는 캅카스는 17세기 말부터 러시아인의 유입이 시작되었다. 국토의 70%가 평원인 러시아에서는 우랄산맥 인근이나 남동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산악 지대를 볼 수 없다. 이러한 가운데 캅카스 역시 러시아인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거칠고 위험한 지역이었다. 17세기부터 이곳은 도망쳐온 농노들과 구교도(분리파교도)들의 피난처였으며 농노제 폐지와 자유를 부르짖다 압박당한 돈강 지역의 카자크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공동기획
한국외국어대학교 HK+ 국가전략사업단
디지털타임스
푸시킨과 톨스토이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역사적 배경을 가진 캅카스를 자신의 작품 속에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낭만적 공간으로 그려내어 찬사를 받았다. 또한 러시아 현대사를 주름잡았던 굵직한 인물들 중에는 캅카스 출신이 상당수 있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스탈린, 소련 외무부장관을 역임하다 독립 이후 조지아의 2대 대통령을 지낸 셰바르드나제, 작곡가로 유명한 하차투랸 등이 대표적인 조지아 출신이다. 혁명시인 마야콥스키가 조지아에서 태어났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솔제니친 역시 북캅카스 출신이다.
이와 같은 캅카스 출신의 정치인과 문학가, 문화예술인은 러시아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들의 공적 중 하나는 자신들의 민속 문화로 러시아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아르메니아 혈통으로 조지아에서 출생한 하차투랸의 음악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 터키·아제르바이잔의 민속음악 전통에 관심을 갖고 다채로운 관현악곡과 발레음악, 영화음악, 극음악, 관현악곡을 작곡했으며, 아르메니아의 국가도 작곡했다.
7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소련에 대한 평가는 주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다뤄져 왔다. 하지만 독자적 민족문화를 가진 수백 개의 집단을 하나의 단일문화로 구성한 소련의 문화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소련 사회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순기능을 갖고 있었다. 유라시아의 국가들이 과거 소련이라는 큰 틀 안에서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갈등으로 얼룩진 현재를 반성케 한다. 과거 소련이 이룩한 여러 문화의 수용과 조화 전통은 오늘날 다문화 사회로 들어서는 한국에 타문화의 수용과 발전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캅카스는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캅카스 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힌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캅카스 산을 굶주린 이들이 사는 춥고 거친 산으로 묘사했다. 이아손의 황금 양털 이야기에서 메데아와 이아손이 만난 곳도 바로 이곳 캅카스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고산들 속에 북캅카스를 가로지르는 체겜강과 테렉강, 말카강, 그리고 수많은 폭포들로 이뤄진 절경은 신화의 세계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푸시킨, 레르몬토프, 톨스토이, 고리키를 비롯하여 아흐마둘리나, 비토프 등 수많은 러시아 작가들이 캅카스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그 중에서도 푸시킨의 서사시 \'캅카스의 포로\'(1822)는 캅카스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강렬한 인상을 부여했다. 푸시킨은 외부세계를 관찰하는 러시아인 포로의 시선으로 캅카스의 깎아지른 봉우리, 솟구치는 샘물, 황량한 평원, 타는 듯한 광야를 생생하게 담아내었다. 포로의 탈출을 도운 체르케스 여인의 조력과 희생은 산악 민족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기도 했다. 푸시킨이 노래하듯 캅카스는 가슴 따뜻한 시절과 모순 가득한 정열의 추억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푸시킨의 이 작품은 톨스토이에게도 영감을 주어 또 하나의 동명소설이 탄생될 수 있게 했다. 톨스토이의 단편 \'캅카스의 포로\'(1872)는 푸시킨의 이야기와 기본 골격은 같지만 두 명의 포로와 주인공의 탈출을 도와주는 어린 소녀로 등장인물에 변화를 주었고, 인간의 도덕적 가치와 헛된 탐욕을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영화 \'캅카스의 포로\'(1996)는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이 톨스토이의 동명소설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다. 1990년대 체첸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오스카상과 골든글로브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영화 \'캅카스의 포로\'라고 하면 풍자와 패러디가 넘쳐났던 1967년판 소련 코미디 영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역시 푸시킨의 서사시에서 유래했다. 다만 한국어 번역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영화의 제목에서 포로는 여성형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민속학자인 주인공은 캅카스의 풍습과 민속을 취재하러 출장을 왔다가 이색적인 문화체험을 하게 된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술을 권하는 문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설상가상으로 캅카스의 풍습인 줄 알고 여대생을 보쌈해가는 악당들에게 일조를 한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안 주인공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결국 구출에 성공한다. 이 영화는 캅카스의 음주 문화와 보쌈 문화를 흥미롭게 다루면서 러시아와 캅카스 간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호기심과 신선함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캅카스의 포로\'는 시대와 장르를 뛰어넘어 러시아인에게 매력적인 주제였다.
오늘날 러시아인은 또 다른 의미에서 캅카스의 포로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 러시아는 1817년에서 1864년까지 이어진 캅카스 전쟁 끝에 북캅카스 지역을 제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당시 러시아에서는 캅카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있었다. 낭만주의가 우세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이국에 대한 동경과 험준한 산악이 주는 원초적 자유 이미지에 매료된 지식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캅카스는 그곳을 방문한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캅카스 문화의 포로로 만들어 놓았다.
캅카스가 러시아에 미친 절대적 영향 중 하나가 식문화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맛집이라고 하는 곳들은 대부분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다. 여행자들이 가장 인상적인 러시아 음식을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러시아식 케밥 샤슬릭(shashlik)이다. 샤슬릭은 쇠꼬챙이에 잘게 자른 양고기를 꿰어 숯불에 구워먹는 음식으로, 양고기 외에도 돼지고기, 닭고기, 연어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러시아의 전통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캅카스에서 유래한 음식이며, 샤슬릭이라는 단어도 튀르크어에서 기인한 것이다. 샤슬릭 외에도 우리의 만두와 유사한 힌칼리(khinkali) 역시 대표적인 조지아 음식이다. 러시아 음식이 캅카스로부터 받은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음식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대표적 술이라고 알려진 보드카만큼이나 러시아인에게 사랑받는 알코올음료가 있다. 바로 조지아산 와인과 아르메니아산 코냑이다.
캅카스의 식문화가 갖는 힘이 얼마나 큰지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오세티아와 조지아의 분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캅카스에 위치한 두 나라의 분쟁 때마다 끊임없이 부상하는 이슈가 있다. 조지아는 보복 조치로 러시아에 물과 와인 수출을 금지시키고, 러시아는 모스크바 시내의 최고급 조지아 레스토랑을 폐쇄한다. 조지아의 수출금지 조치는 러시아를 상대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러시아인은 조지아산 물과 와인 없이는 생활이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인이 가장 즐겨 마시는 생수와 와인 브랜드 상위권이 모두 조지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가 취해지면 러시아는 유럽의 제3국을 통해 조지아산 물과 와인을 수입해온다. 그야말로 러시아에서 조지아의 식문화 가치가 어떠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가 옛날부터 포도 농사로 유명했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노아의 방주는 대홍수 끝에 아라라트 산에 도착한다. 노아는 이곳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어 먹었다. 실제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와인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조지아다. 조지아에서 기원전 6000년 전 와인을 발효하고 보관하던 항아리인 크베브리(kvevri)가 대거 발견되었으며, 양조용 포도씨앗도 발견되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모두 양질의 와인과 코냑을 생산한다. 다만 국제 브랜드로 홍보되고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조지아가 와인으로 먼저 이름을 올렸고, 아르메니아는 코냑으로 알려져 각각 제품을 특화시켜 생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코냑이 갖는 상징성은 대단하다. 로마역사가 플리니우스와 타키우스에 따르면 로마시대부터 아르메니아산 코냑은 황제에게 진상되던 최상품이었다. 아르메니아산 코냑은 소련의 대표적 상품으로 해외 정상들을 대접할 때에도 등장했다.
1943년 테헤란 3국 수뇌회담에서 스탈린은 코냑 마니아로 유명했던 처칠에게 의전 선물로 아르메니아산 코냑 두 박스, 12병을 보냈다. 스탈린이 보낸 코냑은 1942년에 출시되어 시중에 공개도 되지 않았던 아르메니아산 \'드빈(Dvin)\'이었다. \'드빈\'은 아르메니아 코냑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카르 세드랴?이 만든 50도의 코냑이었다. 이보다 앞선 1941년 영국 외무부장관 안소니 이든(Anthony Eden)이 모스크바에서 슈스토프산 아르메니아 코냑을 가져갔지만, 처칠이 이것을 맛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혁명 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에서 코냑은 아르메니아의 슈스토프와 조지아 접경 다게스탄 지역의 키즐랴르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슈스토프산 코냑은 최고의 품질로 알려져 있었다.
1945년에는 처칠의 요청에 따라 스탈린은 매달 \'드빈\'을 영국으로 보냈고, 처칠은 1951년까지 아르메니아산 코냑을 마셨다고 한다. 1949년 처칠의 75세 생일에 스탈린이 75병의 \'드빈\'을 선물로 보내자, 처칠은 자신이 100살이 아닌 것을 몹시 아쉬워했을 정도였다.
소련에서는 널러 퍼져있던 처칠과 아르메니아산 코냑의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 논란이 꾸준히 존재했다. 처칠의 회상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 프랑스산 코냑 하인(Hine)과 프랑스산 샴페인 폴 로저(Pol Roger)만 마셨다고 한다. 처칠이 아르메니아산 코냑을 즐겼다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고, 일각에서는 이 이야기가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을 모욕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산 코냑은 1877년에 설립된 예레반 아라라트 코냑 와인 보드카 콤비나트에서 생산되는 \'노이(Noy)\' 그리고 1887년 설립된 예레반 코냑 공장에서 생산되는 \'아라라트(Ararat)\'와 \'드빈\'이 있다. 아르메니아의 대표적 코냑 브랜드 \'아라라트(Ararat)\'는 아르메니아 민족의 상징적인 산 이름에서 유래했다. 앞서 출시된 \'노이\'는 우리식 발음으로는 \'노아\', 즉 아르메니아인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여기는 성경의 인물에서 따온 것이다. 코냑의 명칭에서 민족과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코냑은 원래 프랑스의 코냑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브랜디에만 붙이는 명칭이지만, 아르메니아 코냑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브랜디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뛰어난 맛으로 코냑협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코냑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캅카스는 물과 술, 음식으로 오늘날 러시아인의 식탁을 채우고 있다. 입맛이 사로잡힌 러시아인은 캅카스의 포로인 셈이다. 정치적 갈등과는 상관없이 캅카스의 문화가 러시아로 들어와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문화의 포용성이 갖는 위대함을 새삼 발견한다.
여전히 화약고인 캅카스가 서로에게 반목하지 않던 평화로운 시절을 기억하고 그 풍성한 문화들로 활기를 되찾기를 바란다. 한동안 러시아는 자국의 와인 브랜드 개발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며 박차를 가했다. 브랜드가 국력이 되어버린 오늘날 더이상 조지아산 와인과 아르메니아산 코냑에 마냥 기댈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과거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받아들여 평화롭게 살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록 인권 및 공산당 독재정치와 관련한 많은 논란이 있긴 했지만 여러 공화국들을 통합하고 각 지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수했던 소련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