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일주일간의 이른 봄 축제… 러시아인 즐기는 삶 고스란히 담아
글쓴이 :
HK담당자
등록일 :
2021-03-31 12:00:10
조회수 :
2,697회
글쓴이 : HK담당자
등록일 : 2021-03-31 12:00:10
조회수 : 2,697회
러시아의 봄맞이 축제는 마슬레니차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마슬레니차는 러시아 문화와 러시아인의 기질, 러시아 역사의 특수성, 종교적 특징을 모두 담은 종합적 성격이 짙다. 북반구에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춘분점을 지나는 3월에 봄을 맞이한다. 일례로 페르시아와 투르크계 민족들이 신년 명절로 기념하는 나브루즈(navruz), 즉 누루즈(Nowruz)라는 춘분제 역시 3월 21일이다. 희한하게도 러시아 봄맞이 축제는 아직 동장군이 물러가지도 않은 2월에 시작된다. 봄기운을 느낄 수 없는 시기에 축제가 치러지는 이유는 바로 정교(正敎)의 수용과 깊은 연관이 있다.
러시아가 강한 기독교 전통을 가진 국가라고 하면 다들 의아하겠지만, 러시아는 988년 키예프 공국 시절 이래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정교(正敎)를 수용한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교는 러시아인의 삶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해왔다. 정교를 수용하기 전, 러시아는 다양한 자연숭배와 조상숭배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흩어져 있던 세력들을 모아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비잔틴제국과의 교역을 염두에 둔 점도 정교를 수용하는 데 있어 크게 작용했다.
정교가 수용되면서 민중의 삶에는 대거 변화가 몰아쳤다. 그중에는 이교(異敎)적 성격의 축제들이 기독교식으로 바뀐 것도 포함되었다. 봄맞이 축제 마슬레니차도 그중 하나였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 행사 중 하나인 부활절은 보통 4월에 있는데, 문제는 부활절을 맞이하기에 앞서 사순절 기간이 있다는 점이다. 사순절은 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로 보통 일요일을 제외한 부활절 이전까지 40일 동안 이어진다. 정교에서는 일요일과 더불어 토요일까지 제외한 40일을 기념한다.
사순절 기간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육식을 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주로 가톨릭 국가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에 앞서 마음껏 먹고 마시는 축제를 3일에서 1주일 동안 즐겼다. 축제를 뜻하는 영어의 카니발(carnival)은 라틴어의 \'카르네 발레(carne vale, 살코기여, 잘 있거라)\' 또는 \'카르넴 레바레(carnem levare, 육식 금지)\'에서 기원했다. 이는 사순절 기간 육식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축제로 달랬던 유럽인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러시아의 마슬레니차도 정교 수용 이후 기독교 문화권의 카니발과 마찬가지로 사순절 기간을 앞두고 마음껏 먹고 즐기는 행사로 바뀌었다. 마슬레니차는 원래 봄이 시작되는 3월 말에 치러졌으나 사순절 기간과 겹치게 되면서 겨울이 한창인 2월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마슬레니차라는 말은 \'마슬로(maslo, 버터)\'라는 말에서 기원했다. 이 축제의 대표 음식은 밀가루와 달걀, 우유를 섞어서 팬에 얇게 부치는 블린(blin)이다. 블린은 러시아인의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음식이지만, 마슬레니차 기간에는 평소보다 버터를 많이 사용하여 부쳐낸다. 앞으로 다가올 사순절을 대비해 미리 든든하게 육식(동물성 기름)을 섭취하는 것이다. 축제 음식인 블린은 태양을 상징한다. 여인들은 둥근 모양의 블린을 구워내면서 손안에서 해를 가지고 노는 유희를 즐겼다. 러시아에서는 마슬레니차 기간이면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커다란 블린을 구워내는 모습이 장관이다. 올해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시(市)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30ℓ의 반죽으로 지름 2m 50cm의 대형 블린을 구워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축제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간 지속되는데 요일마다 주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월요일은 \'만남의 날\', 화요일은 \'유희의 날\', 수요일은 \'미식가의 날\', 목요일은 \'흥청망청 즐기는 날\', 금요일은 \'장모의 날\', 토요일은 \'시누이 초대의 날\', 마지막 일요일은 \'용서의 날\'이다. 먼저 축제의 첫날은 \'마슬레니차\'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이날은 마을 어귀에 추첼로(chuchelo)라고 일컫는 커다란 지푸라기 인형을 세워놓고, 태양을 형상화한 수레바퀴를 썰매에 매달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또한 죽은 사람들을 추도하고 블린을 구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둘째 날은 신붓감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는 사순절이 끝나는 대로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젊은 사람들은 언덕에 올라 눈썰매를 타고 블린을 먹으러 오라고 친척과 지인들을 부른다. 셋째 날에는 장모가 사위를 위해 직접 블린을 구워 환심을 사고 다른 손님들도 초대한다.
넷째 날은 축제의 흥겨움이 한층 고조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이 \'가족 단위로 이뤄지는 축제(narrow maslenitsa)\'였다면, 목요일부터는 \'모두가 즐기는 마슬레니차(wide maslenitsa)\'로 전환되어 축제의 규모가 한층 커진다. 눈싸움, 원무(강강술래), 말타기 등 온갖 놀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눈 덮인 마을을 습격해서 점령하는 놀이다. 남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 주먹다툼을 벌인다. 평지에서 싸우는 경우도 있지만, 언덕이 있는 곳에서는 한 무리는 언덕 위에, 다른 한 무리는 언덕 밑에 있다가 주먹다툼을 벌이고 언덕을 차지하는 방식이다. 언덕을 차지한 무리는 봄이 겨울을 내몰고 승리하였음을 알린다.
주먹다툼은 러시아의 전통놀이로 엄격한 규칙이 있다. 러시아 문화를 모르는 외국인이라면 과격한 그들의 놀이에 화들짝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맨손만 사용하기, 한 사람만 집중적으로 때리지 않기, 쓰러진 사람을 또 때리지 않기 등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얼핏 보면 단순 과격한 패싸움 같지만, 남성들의 \'집단놀이 문화\' 속에 한 해의 묵은 감정을 날려 보내는 러시아인의 특별한 의식이다. 이 밖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모닥불을 피우고 불 한 가운데를 뛰어넘는 놀이를 통해, 러시아인은 다가오는 봄에 대한 기대를 한껏 표출한다.
다섯째 날은 앞서 사위를 대접했던 장모에 대한 답례로, 이번에는 장모가 친구들과 친척들을 이끌고 사위를 방문한다. 이날은 딸이 사위의 아내 자격으로 손수 블린을 만들어 대접하고 사위는 장모의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환심을 사는 노력을 보인다. 여섯째 날은 갓 시집온 며느리가 시누이들과 남편의 친척들을 초대하는 날이다. 며느리는 시누이들과 미혼인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기혼인 시누이의 가족들을 불러 대접한다.
축제의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은 마슬레니차의 절정이다. 서로를 불편하고 모욕을 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날이다. 고인을 추모하고 목욕재계를 하며 축제의 남은 음식을 불태우고 접시를 깨끗이 닦는다. 또한 축제 첫날 만들어놓은 추첼로를 불에 태워 재를 들판에 뿌림으로써 겨울이 완전히 물러갔음을 선포한다. 겨울의 온갖 묵은 때를 지푸라기 인형으로 상징화하여 화형시키는 의식, 해를 자신의 손 안에서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는 의미에서 만들어 먹는 블린, 남성들의 놀이를 통해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것과 조상숭배, 목욕재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민간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교적 행위들이 정교 수용과 더불어 기독교식으로 자연스럽게 융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바탕의 난장이었던 마슬레니차의 괴기스런 행동들은 마지막 날 \'용서의 주일\'로 승화된다. 이 날은 \'복 프로스티트(신께서 용서하시길)\'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용서를 구한다.
마슬레니차 축제의 근간은 봄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듯, 삶 속에서 묵은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진다. 가장 가까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많이 상처를 주고받는 시댁 식구들과 며느리, 사위와 장모는 축제 기간 동안 관계를 다시 조정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더불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시원하게 한 방씩 날리는 놀이는 특정인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대신 공식적인 기회를 통해 원망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과장된 놀이와 지나치리만큼 풍성하고 기름진 음식은 한 해를 살아오면서 쌓였던 어두움을 밀어내고 새롭게 살아갈 힘을 제공한다.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인에게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삶의 동력을 제공함과 동시에 사순절로 접어들기 전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러시아인의 \'삶을 즐기는\' 모습이 마슬레니차 축제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인생을 살면서 실수할 수 있고 또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신께서 이런 모습마저도 다 용서하실 거라는 깊은 신앙심이 이들의 축제에서 묻어난다.
이러한 축제를 통해 배우는 것은 삶에는 적당한 긴장과 이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잠시 일상을 멈추고 이성에 지배받지 않은 \'본능적인 모습\',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의 건강한 일탈은 삶을 보다 역동적이게 만드는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단기간에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한 한국인은 긴장된 경제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폭음으로 푸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 또한 마슬레니차를 통해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삶의 긴장을 풀기도 하지만 축제 말미에는 화해와 평화의 의식을 통해 긴장의 이완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삶의 균형을 강조한다. 이는 경제 성장을 위해 한없이 달려온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절한 삶의 밸런스를 찾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러시아의 마슬레니차 축제를 통해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