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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타임스][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분단의 섬` 벗어난 대륙직행의 꿈… 숱한 부침속에도 명맥 이어와

글쓴이 : HK담당자

등록일 : 2021-02-16 12:00:00

조회수 : 1,4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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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NdAUH2WpB0

동구가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던 당시의 분위기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1991년 9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1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2년 1월) 등 남북 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통일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일일 것이라는 기대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급속한 변화와 화해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탈냉전과 공산권의 몰락에 대한 북한의 두려움과 대응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다. 공세적인 한국의 외교정책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던 북한의 반격은 노태우 정부 퇴진 후 김영삼 정부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신한국 창조를 기치로 내걸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면서 북한과의 관계 증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불과 2주일 뒤, 장기수 리인모의 북송발표 다음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나섬으로써 한국에게 말 그대로 \'핵 펀치\'를 날렸다. 북한의 핵 협박은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북한이 그토록 오랜 시간 소망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이끌어 냈으며,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시작된 북한 핵 위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완전한 해결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현재 북한은 핵 능력을 완성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이 이러한 북한의 공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북방정책이 불러일으킨 착시현상과 관계가 있다. \'북한의 변화\'라는 목적성만을 놓고 평가한다면, 북방정책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공산권과의 관계개선 및 북방으로의 진출은 남북관계 변화를 위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겠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변화하였다고 해서 북한도 반드시 변화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며, 공산권의 변화와 북한의 변화는 동일선상에서 취급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북방정책은 대북정책과는 구분되어 취급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방정책이 갖는 복합적 정체성(통일정책, 외교·안보정책, 국가전략으로서의 특징)은 북방정책과 대북정책을 동일시하게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고, 한국의 전략적 오판을 유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핵을 앞세운 북한의 반격이었다.

결국 노태우 정부 시절 화려하게 빛났던 북방정책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그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북의 핵 위협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100일 회견\'을 통해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남북관계는 다시 극도의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되고, 진정한 문민정부라는 자부심 하에 국내정치에 바빴던 김영삼 정부로서는 노태우 정부 시절만큼의 열정을 북방정책에 할애할 여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용출 교수(2003)는 "북방정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동 정책의 불행한 말로와 그 이후 정권들의 의도적인 정책 단절 표방으로 정책 결정과 집행 당시의 높은 관심이 지나자 거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라고 평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탈냉전과 더불어 진행된 세계화라는 흐름은 북방으로의 진출을 더 이상 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끔 하는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냉전체제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쇠퇴는 자본주의를 지배적인 체제로 등장시켰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은 국가와 이념이 아닌 시장과 자본이 우선시 되는 세상을 가져왔다. 세계가 행위자와 장소의 구분 없이 서로간의 점증하는 의존과 교류를 통해 전일화(全一化) 되어가는 상황에서 북방으로의 진출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이러한 세계화의 물결과 북한 핵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 핵 문제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임시로 봉합되었고, 세계화의 흐름은 우리 국가의 OECD 가입, 즉 선진국 클럽 진입이라는 결과로 화답하는 듯 보였지만, 임기 말에 이르러서는 결국 외환부족으로 인해 IMF에 긴급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어려운 상황 속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제위기의 극복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초반은 이러한 경제위기 극복에 맞춰져 있었다. 1998년 2월 25일의 취임사는 \'외자유치, 벤처기업 육성, 노사화합\' 등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동시에 북한을 향해서는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밝힘으로써 흡수통일에 대한 북의 우려를 해소시키는 동시에, 특사교환과 정상회담을 제안함으로써 관계 개선의 의지를 밝혔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회복한 자신감 속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을 통해 민간교류 사업을 진행하였고, 북한은 미·일과도 화해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북방을 향한 우리의 의지가 다시금 불타오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의지가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한 \'철의 실크로드\' 구상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후 성남공항에서 열린 귀국보고회에서 "기차가 런던과 파리로 갈 수 없는 것은 경의선이 단절됐기 때문"이라면서 "경의선이 이어질 경우 유럽까지 뻗어가고, 한·일간도 해저터널로 연결되는 \'철의 실크로드\'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철의 실크로드 구상은 이후 2000년 광복절 경축사, 2001년 2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동년 12월 유럽의회 연설, 2002년 9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개막식 연설 등을 통해 꾸준히 강조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철의 실크로드 구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로 연결하는 초고속 정보통신망으로 \'정보화 실크로드\'를 구축 \'e-유라시아\'를 실현해야 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김대중 정부가 철의 실크로드 구상에 거는 기대는 작지 않았고, 국민의 기대 또한 컸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호적인 남북관계와 중·러의 협조, 그리고 안정적인 동북아 상황이 필수적인 것이었고, 2002년 10월 발생한 제2차 북 핵 위기는 남북정상회담으로 형성되었던 우호적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켜 남북관계가 또 다시 얼어붙게 됨으로써 철의 실크로드 구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에 의해 주창된 철의 실크로드 구상은 이후의 정부를 거치면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기본 아이디어는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그 아이디어가 그만큼 매력적인 것이라는 증거이며, 이 시기부터 북방정책의 국가전략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표출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땅에서 출발한 열차가 북한을 통과해 시베리아나 중국 내륙을 횡단해서 프랑스 파리로, 영국 런던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비전의 제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북방에의 꿈을 꾸게 하였다. 기차를 타고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과 소련을 거쳐 유럽을 여행하고 우리 물건이 수출된다? 생각만 해도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는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가슴에 대륙을 품고 시선을 세계로 돌리게 하는 \'시동어(始動語\')가 되었다. 분단의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향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그랜드 비전(Grand Vision)의 제시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것이기도 하였다. 한반도가 자리한 지정학적 위치와 상대적인 국력의 약함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체계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피동적 위치에 머물러 있던 한국으로서는 무언가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우리 물건에 자부심을 갖고, 세계 1등을 당연시하며, 한류의 융성을 보면서 문화적 우월감에 취하기도 하지만, 사실 역사 속에서 우리 국민이 이러한 자긍심과 우월감을 가졌던 경험은 쉽게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이런 낙관적이고도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 것도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정부가 주장했던 철의 실크로드는 \'국민소득의 증가, IMF 경제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북한과의 정상회담과 남북관계의 진전, 적대적 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에서의 공존·공영의 모색,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등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우리 국가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각은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북아 중심국가론으로 표출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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