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타임스][북방문화와 脈을 잇다] 脫냉전·남북 화해무드서 싹튼 북방… 안보에서 경제협력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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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담당자
등록일 :
2021-02-09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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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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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dRfTxF30OY
첫 연재에서 \'북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북방을 꿈꾸는가?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였다. 우리 각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북방을 정의하고 꿈꾸며, 이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노태우 정부 시기 등장한 \'북방정책\'은 꿈의 현실화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가시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북방정책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973년 비적성국가에 한하여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천명한 \'6·23 선언\'과 1983년 6월 29일 이범석 외무장관의 국방대학원 강연에서 언급된 \'북방외교\'를 만날 수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북방정책을 노태우 정부의 독창적 착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북방정책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주목받게 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고, 이후 헝가리를 필두로 공산권과의 외교정상화를 연달아 성공시킴으로써 북방정책은 우리 역사 속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소와의 수교로 그 절정에 달했던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가 물러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특히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상황은 북방정책의 화려했던 영광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임으로써 북방정책이라는 용어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북방정책이 다시 등장한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26일 북방경제를 주관하기 위한 위원회 설립을 지시하였고, 동년 8월 \'북방경제협력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동년 9월 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기조연설을 통해 \'신북방정책\' 구상을 제시하였다. 1987년 민주화와 냉전의 붕괴에 힘입어 등장하였던 북방정책이 한 세대 이후 \'신북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신)북방정책\'이라는 명칭이 공식적 정책용어로서 사용된 것은 노태우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이지만, 다른 정부들에서도 동일한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 한국 외교정책의 역사 속에서 북방에의 지향성은 면면부절 존재해 왔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출범한 역대 정부들은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성을 특정한 어휘로 천명해 왔는데, 각자의 독특성 속에서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북방에 대한 지향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방정책은 언제,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에 답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체성에 관해 생각해보자. 북방정책은 본질적으로 외교정책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치이론에서 한 나라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분석할 때, 매우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지만, 그 분석 수준에 있어서는 국제체제수준, 국가·사회수준, 정책결정자(혹은 정책결정자 집단) 수준의 세 가지(혹은 네 가지) 분석수준이 빈번히 사용된다.
이 중 어떠한 분석수준을 선택하는가는 \'분석의 대상이 처한 시기적 상황\' 및 \'분석의 주체가 갖는 시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국제정치의 주된 분석 시각 중 하나인 현실주의적 접근의 경우 주로 환경이 국가에 부과하는 제약과 기회에 집중하는데, 단일한 행위자로서의 국가에 주목하는 동시에 어떤 결정에 대한 \'밖에서 안\'으로의 설명에 중점을 둔다. 즉, 국제체제가 국가의 행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주로 이야기 하는데, 냉전기 외교정책 연구들은 주로 현실주의적 시각을 차용했다. 이는 한국외교정책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국 외교정책은 대개 세 가지 제약요건 속에서 결정되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분단 상황과 세계질서의 변화를 포함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 및 주변국과 비교한 한국의 상대적 국력이다. 둘째,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이다. 셋째, 정책결정자가 갖는 상황인식 및 국가목표 등이다. 상기한 분석의 수준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체계수준, 국가수준, 정책결정자 수준의 세 가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뒤얽혀 한국의 외교정책을 결정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도록, 그리고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체계적 수준의 제약이다.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국제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아온 땅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제정세의 영향은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특히 20세기 초반,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경험해야 했던 식민의 시절, 해방과 분단, 전쟁과 휴전, 분단의 고착화는 체계적 수준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따라서 체계수준의 변화는 한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직결된다. 핑퐁외교로 가시화된 미·중 화해무드와 세계적 데탕트는 \'7·4 남북공동성명\'과 \'6·23선언\'을 낳았고, 1980년대 후반 진행된 탈냉전의 움직임과 화해·협력의 조류는 북방정책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냉전적 적대구조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면서 한국정부는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즉 소위 \'7·7선언\'을 발표하고 민족공동체로서의 남북이라는 인식 하에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추구하게 된다. 북방정책의 탄생이다.
북방정책의 등장은 휴전 이후 한 세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냉전적 양극구조에 종속되어 고정된 방향과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외교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탈냉전으로 상징되는 신국제질서의 도래는 한국외교가 피동성과 체계종속성을 떨치고 일어나 방향과 범위를 재설정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우리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북방정책은 특히 한·미동맹으로 상징되는 한국외교 중심축의 변화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냉전시대 동북아의 안보구조는 흔히 한·미·일의 남방3각과 북·중·러의 북방3각의 대치구조로 설명되곤 했다. 그러나 탈냉전과 함께 한국이 중·러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과거의 대립구조를 벗어나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의 활동반경은 확장되었다.
한국 외교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주성과 능동성을 크게 자극하였던 북방정책은 등장 이후 꾸준한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필자의 견해로는 대략 세 가지 성격이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통일정책, 외교·안보정책, 그리고 국가전략\'으로서의 모습이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동시에 복합적·중층적으로 존재한다.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통칭하여 국가전략이라고 부른다. 이런 맥락을 따른다면 통일정책이나 외교·안보정책도 국가전략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의 \'국가전략\'은 \'통일·외교·안보정책을 포함하는 동시에 북방이라는 지리적 목표를 명확히 하는 지전략(geostrategy)이자 경제전략\'이며, 북방정책이 확대·발전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통일·외교·안보정책과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즉 통일정책과 외교·안보정책, 그리고 국가전략의 세 가지 특성들이 결합하여 \'북방정책\'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북방정책 등장 초기에는 통일정책과 외교·안보정책으로서의 특성이 강조되었으며, 북방외교라는 용어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외무부(1992)는 "국제질서와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한반도 안보환경을 개선시켜 새로운 남북관계를 설정할 목적 하에 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공보처(1992)는 "북방 사회주의 제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하여 종래 서방국가만을 대상으로 하였던 한국외교를 전방위 외교로 광역화시키는 것"이라는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전웅(1993) 교수는 북방정책과 북방외교를 결합한 북방외교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남북한 간의 평화정착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원교근공의 전략이고 간접접근 전략으로서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려는 포위·압력 전략"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는 통일정책으로서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김태현(1998) 교수는 북방외교는 "북한을 고립시키고 약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도모하는 국가안보전략의 성격이 아닌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즉 위협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국제안보전략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북방정책의 통일정책이자 외교·안보 정책으로서의 특징에 주목한다.
전재성(2003) 교수는 북방정책의 목표를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평화적 통일기반 조성, 소련, 중국, 기타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외교영역 확대와 국제적 지지기반 확충, 경제적 진출과 자원공급원 확보를 통한 국가이익의 추구" 등으로 규정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북방정책에 대한 설명의 뉘앙스가 조금씩 바뀌며, 지금에 가까울수록 북방정책을 국가전략으로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해짐을 알 수 있다.
현재에 이르러,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에서는 국가전략으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신북방정책은 평화를 기반으로 유라시아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대륙전략이다. 남·북·러 3각 협력 추진기반을 마련하고 한-EAEU(유라시아경제연합)간 FTA 추진과 중국 \'일대일로\' 구상 참여 등을 통해 동북아 주요국 간 다자협력을 제도화하고 나아가 한반도·유라시아 지역을 연계해 나가는 정책이다." 여기서 통일은 찾기 힘들다. 대신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가전략\'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과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북방정책의 목적성 또한 변화해 왔으며, 이와 같은 변화 가능성과 복합성이 북방정책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적 요소로서 작동하고 있다. 앞으로의 연재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꾸준히 추적할 것이며, 다음 연재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철의 실크로드\'와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이니셔티브\' 등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북방정책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973년 비적성국가에 한하여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천명한 \'6·23 선언\'과 1983년 6월 29일 이범석 외무장관의 국방대학원 강연에서 언급된 \'북방외교\'를 만날 수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북방정책을 노태우 정부의 독창적 착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북방정책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주목받게 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국가에도 국제협력의 통로를 넓게 하여 북방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고, 이후 헝가리를 필두로 공산권과의 외교정상화를 연달아 성공시킴으로써 북방정책은 우리 역사 속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소와의 수교로 그 절정에 달했던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가 물러나고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특히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상황은 북방정책의 화려했던 영광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임으로써 북방정책이라는 용어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북방정책이 다시 등장한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26일 북방경제를 주관하기 위한 위원회 설립을 지시하였고, 동년 8월 \'북방경제협력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동년 9월 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기조연설을 통해 \'신북방정책\' 구상을 제시하였다. 1987년 민주화와 냉전의 붕괴에 힘입어 등장하였던 북방정책이 한 세대 이후 \'신북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신)북방정책\'이라는 명칭이 공식적 정책용어로서 사용된 것은 노태우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이지만, 다른 정부들에서도 동일한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 한국 외교정책의 역사 속에서 북방에의 지향성은 면면부절 존재해 왔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출범한 역대 정부들은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성을 특정한 어휘로 천명해 왔는데, 각자의 독특성 속에서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북방에 대한 지향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방정책은 언제,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에 답함으로써 북방정책의 정체성에 관해 생각해보자. 북방정책은 본질적으로 외교정책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치이론에서 한 나라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분석할 때, 매우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지만, 그 분석 수준에 있어서는 국제체제수준, 국가·사회수준, 정책결정자(혹은 정책결정자 집단) 수준의 세 가지(혹은 네 가지) 분석수준이 빈번히 사용된다.
이 중 어떠한 분석수준을 선택하는가는 \'분석의 대상이 처한 시기적 상황\' 및 \'분석의 주체가 갖는 시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국제정치의 주된 분석 시각 중 하나인 현실주의적 접근의 경우 주로 환경이 국가에 부과하는 제약과 기회에 집중하는데, 단일한 행위자로서의 국가에 주목하는 동시에 어떤 결정에 대한 \'밖에서 안\'으로의 설명에 중점을 둔다. 즉, 국제체제가 국가의 행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주로 이야기 하는데, 냉전기 외교정책 연구들은 주로 현실주의적 시각을 차용했다. 이는 한국외교정책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국 외교정책은 대개 세 가지 제약요건 속에서 결정되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분단 상황과 세계질서의 변화를 포함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 및 주변국과 비교한 한국의 상대적 국력이다. 둘째,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이다. 셋째, 정책결정자가 갖는 상황인식 및 국가목표 등이다. 상기한 분석의 수준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체계수준, 국가수준, 정책결정자 수준의 세 가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뒤얽혀 한국의 외교정책을 결정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도록, 그리고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체계적 수준의 제약이다.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국제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아온 땅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제정세의 영향은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특히 20세기 초반,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경험해야 했던 식민의 시절, 해방과 분단, 전쟁과 휴전, 분단의 고착화는 체계적 수준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따라서 체계수준의 변화는 한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직결된다. 핑퐁외교로 가시화된 미·중 화해무드와 세계적 데탕트는 \'7·4 남북공동성명\'과 \'6·23선언\'을 낳았고, 1980년대 후반 진행된 탈냉전의 움직임과 화해·협력의 조류는 북방정책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였다. 냉전적 적대구조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면서 한국정부는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즉 소위 \'7·7선언\'을 발표하고 민족공동체로서의 남북이라는 인식 하에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추구하게 된다. 북방정책의 탄생이다.
북방정책의 등장은 휴전 이후 한 세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냉전적 양극구조에 종속되어 고정된 방향과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외교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탈냉전으로 상징되는 신국제질서의 도래는 한국외교가 피동성과 체계종속성을 떨치고 일어나 방향과 범위를 재설정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우리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북방정책은 특히 한·미동맹으로 상징되는 한국외교 중심축의 변화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냉전시대 동북아의 안보구조는 흔히 한·미·일의 남방3각과 북·중·러의 북방3각의 대치구조로 설명되곤 했다. 그러나 탈냉전과 함께 한국이 중·러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과거의 대립구조를 벗어나 공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의 활동반경은 확장되었다.
한국 외교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주성과 능동성을 크게 자극하였던 북방정책은 등장 이후 꾸준한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필자의 견해로는 대략 세 가지 성격이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통일정책, 외교·안보정책, 그리고 국가전략\'으로서의 모습이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동시에 복합적·중층적으로 존재한다.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통칭하여 국가전략이라고 부른다. 이런 맥락을 따른다면 통일정책이나 외교·안보정책도 국가전략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의 \'국가전략\'은 \'통일·외교·안보정책을 포함하는 동시에 북방이라는 지리적 목표를 명확히 하는 지전략(geostrategy)이자 경제전략\'이며, 북방정책이 확대·발전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통일·외교·안보정책과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즉 통일정책과 외교·안보정책, 그리고 국가전략의 세 가지 특성들이 결합하여 \'북방정책\'이라는 하나의 범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북방정책 등장 초기에는 통일정책과 외교·안보정책으로서의 특성이 강조되었으며, 북방외교라는 용어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외무부(1992)는 "국제질서와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한반도 안보환경을 개선시켜 새로운 남북관계를 설정할 목적 하에 북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공보처(1992)는 "북방 사회주의 제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하여 종래 서방국가만을 대상으로 하였던 한국외교를 전방위 외교로 광역화시키는 것"이라는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전웅(1993) 교수는 북방정책과 북방외교를 결합한 북방외교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남북한 간의 평화정착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원교근공의 전략이고 간접접근 전략으로서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려는 포위·압력 전략"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는 통일정책으로서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김태현(1998) 교수는 북방외교는 "북한을 고립시키고 약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도모하는 국가안보전략의 성격이 아닌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즉 위협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국제안보전략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북방정책의 통일정책이자 외교·안보 정책으로서의 특징에 주목한다.
전재성(2003) 교수는 북방정책의 목표를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평화적 통일기반 조성, 소련, 중국, 기타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외교영역 확대와 국제적 지지기반 확충, 경제적 진출과 자원공급원 확보를 통한 국가이익의 추구" 등으로 규정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북방정책에 대한 설명의 뉘앙스가 조금씩 바뀌며, 지금에 가까울수록 북방정책을 국가전략으로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해짐을 알 수 있다.
현재에 이르러,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에서는 국가전략으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신북방정책은 평화를 기반으로 유라시아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대륙전략이다. 남·북·러 3각 협력 추진기반을 마련하고 한-EAEU(유라시아경제연합)간 FTA 추진과 중국 \'일대일로\' 구상 참여 등을 통해 동북아 주요국 간 다자협력을 제도화하고 나아가 한반도·유라시아 지역을 연계해 나가는 정책이다." 여기서 통일은 찾기 힘들다. 대신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가전략\'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과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북방정책의 목적성 또한 변화해 왔으며, 이와 같은 변화 가능성과 복합성이 북방정책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심적 요소로서 작동하고 있다. 앞으로의 연재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꾸준히 추적할 것이며, 다음 연재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철의 실크로드\'와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이니셔티브\' 등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